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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韻文 Verse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한글 (1981) c̅ 클로버 747TF

by 여우ㅤㅤ 2023. 11. 4.

2020년 12월 29일 화요일 오전 7시, 섭씨 0도.
인생은 참으로 신비롭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作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崔勝子, 1952-)는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1979년 가을호 '문학과지성'(文學과知性)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서울역 뒤편에 위치한 청파동은 경부선 철도와 경계를 따라 갈월동, 남영동과 맞닿아 있다. 시인 최승자가 노래한 1980년대의 청파동에는 허름한 빈대떡 식당들과 낡은 골목들이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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